Talk to Myself

슬렁슬렁 2022. 9. 22. 23:20

double exposure

 

"어, 저기로 가서 길을 건너서 다시 계속 쭉 가면 되지만 굉장히 먼데."

아낙은 단정한 쪽머리를 하고 목까지 단추를 채운 흰색 블라우스에 옅은 색상의 청바지 차림이었어.

안경을 썼는지 안 썼는지는 기억이 안나는데 눈빛이 참 깊구나 라는 게 첫인상.

 

리베라 모텔을 나서기 전에 네이버지도를 참고해

논산역은 702번 버스 종점에서 내려 1km 이내에 있는 것을 확인했지만

참고 할 중간 랜드마크를 체크하지 못한 게 불찰이었지.

게다가 버스에서 잠깐 단잠에 빠지다보니 방향회로가 좀 멍한 상태였고.

 

뒤를 돌아보며 가리키길래 그쪽이구나, 방향을 잡아 고맙다고 인사를 하자

"아이고, 거길 걸어서 가시면 상당히 멀어요.

여기에서 택시 타고 가세요. 기본요금밖에 안나와요." 

 

늦은 아침이지만 9월 중순의 햇살은 서서히 독기를 끌어올리고 있을 때였고,

거의 모든 일반인들의 거리감각은 이미 차량 주행계를 기준으로 작동하고 있으니

내가 그냥 인사를 하고 계속 가려 하자 펄쩍 뛰는 것도 이해는 갔지.

그런데 그 분이 갑자기 지갑형 핸드폰을 뒤지더니

거기에 두 번 접어 고이 간직하고 있던 만원짜리 지폐 한 장을 꺼낸다.

 

"이걸로 타고 가세요!"

"어, 아뇨. 아뇨. 걸어가도 금방이에요."

그래도 막무가내다.

강제로 내 손에 그 비상금을 쥐여주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듯이 사라져버렸다.

 

뜨거운 아침 열기 속의 거리에는 오가는 행인이 한 명도 없다.

난생 처음으로 지하철에서 자리를 양보하려던 젊은 청년을 만났던 바로 그때의 그 기분.

'나는 반드시 양보하겠다'는 결사적인 눈빛의 그 젊은이에게

내가 자리에 앉지 않으면 그 아이의 앞길을 망칠 것 같았던 바로 그 기분.

그 날 처음으로 거울 앞에서 얼마나 진지하게 내 겉모습을 살펴보았던가.

 

갑자기 이런저런 사정으로 집에 갈 차비가 없다며 손을 벌리던

40여년 전에 처음 만났던 길거리 예비군 용사.

난 너무 불쌍해서 공중전화로 친구에게 전화 해서

우리가 그 용사를 어떻게 도울 수 없을까 상의를 했더랬지.

그래서 그랬나. 대략 10년 정도의 주기로

이런저런 다양한 버전의 용사들이 나를 찾아오고 있는데

혹시 내가 원하지 않게 최상위의 버전의 용사는 아니었을까.

 

P9210978

 

택시는 탔고

만원은 똑같은 방식으로 접어 지갑에 남겼다.

또 다른 나를 만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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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의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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