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메랑

이어가기 2020. 8. 17. 04:11

아마도 대여섯 살 무렵이었을 거야.

남자 막내가 엄마 젖에서 떨어질 줄을 몰라 늘 턱받이를 하고 있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니.

당시 나는 낯선 집을 방문하고 있었는데 엄마와 어떤 아줌마들 서너 명은 마루에 앉아 있고

나는 엄마 무릎 지근 거리의 마당을 맴돌고 있었는데

갑자기 깔깔대며 담소하고 있던 사람들이 눈을 크게 뜨면서 일제히 나를 바라 보네.

나도 어리벙벙해서 엄마를 보니 엄마가 엉엉 우는 거야.

이건 또 뭔 시츄에이션? 놀란 나는 당신의 안색을 가만히 직관적으로 살피는데

뭐 진짜 슬퍼서 우시는 건 아닌데 ... 해서

뜨악하게 '어쩌라고?' 표정으로 빤히 엄마의 얼굴을 올려다보니

'나는 슬프다. 이때 너는 ...?' 이란 바디랭귀지가 읽히는 거야.

 

그러면 어린 소년은 함께 우는 거지.

무슨 상황인지도 모르고 일단 우는 거지.

같이 우는 거야. 뭔가 슬프잖아.

우는 사람은 슬픈 거니

같이 우는 거지.

 

그러자 갑자기 엄마가 눈가에서 두 손을 떼며

"호호 ... 얘가 이래요." 하시자

아줌마들 모두가 웃었다.

 

막내는 참 예뻤다.

아빠는 막내를 껴안고 살았고

동네에서도 귀여움은 아이의 몫,

한 아주머니가 넋을 잃고 처다보는 장면이 껴든 

유치원 졸업사진은 그 생생한 증거.

 

그러나 어쩌랴

모친께서는 극단적인 폐쇄주의자시라

우리들의 천방지축 기질은 철저한 (그러나 구멍이 숭숭 뚫린) 압제 하에 있었는데

막내의 가출병은 오빠들을 압도해서

석식시간 때 걔를 찾아오는 게 내 일과이기도 했으니. 

 

어느 더운 여름철 토요일 오후에

아이가 그 동안의 불법행위에 대해

마당에서 엄마에게 개패듯 맞으며 몰아서 혼나고 있을 때

세 형제는 건넛방에서 TV 시청에 몰두하고 있었다.

 

당시 아프카니(AFKN)는 토요일마다 한 시간이 좀 안 되는 프로레슬링 경기를 중계했는데

가장 핫한 선수가 럭키 존슨이었다.

그의 특기는 드롭킥이다.

적군에게서 로프 반동에 이은 백 바디 드롭Back Body Drop 공격을 받았을 때

넉장거리로 나가떨어지는 게 아니라

유연하게 공중에서 몸을 쫙 폈다 두 발로 착 착지한 후

기고만장 으스대며 뒤돌아선 그 나쁜 놈을

드롭킥 한 방으로 잠 재워 버린다.

물론 한참을 두들겨 맞는 과정이 있었을 때는

가끔 유연성에 부하가 걸려 더 험한 꼴이 나올 때도 있었지만

대체적으로 럭키 존슨은 무사 착지에 이은 드롭킥으로 임무를 완수해

힘든 청소년기를 보내고 있던 형제들의 스트레스를 달래주었다.

따라서 그의 경기는 항상 프로그램 마지막에 나와서,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막내의 비명이 뚝 그치더니 엄마가 우리 방으로 들어오셔서 소리치셨다.

"야 이놈들아, 너희들이 말려야 할 거 아냐!"

엄마는 땀을 비오듯 쏟으시며 울고 있었다.

 

TV를 우리가, 아니 형이 껐는지 당신이 꺼버렸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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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의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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