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정석 98/100

Subway Panorama 2019. 10. 25. 03:29

그때가 아마도 봄이나 가을의 화창한 토요일 오후였을 걸.
듣고 듣고 또 들어도 질리지 않은 동요메들리로 2차를 즐기며 집으로 가던 길
앞에서도 한 번 이야기한 것 같은데, 혼자서 숫자세기 놀이를 하다가
처음으로 99까지 접근하자 
"으악, 아빠. 내가 여기까지 와버렸어!"
너무 놀라 동그랗게 0자 모양으로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물었지.
"그 다음은 뭐야?"
제 지정석에 앉아 고사리 같은 한 손으로는 우유병을 들고 
또 한 손으로는 제 발의 삼차원 지형을 탐색하면서
정체된 여의도 찻길 위의 옆 차들을 구경하던 동생도 들었지.
100이라고. 그 다음부터는 백일, 백이, 백삼... 이렇게 센다는 현명한 아빠의 대답을.

1차로 들렀던 곳은 한 달에 한 번씩 열렸던 KBS 어린이음악회.
마침 그 날은 예매 전산망의 오류로 표가 중복 판매되는 바람에
우리 좌석은 이미 다른 아줌마네 가족이 차지하고 있었고
(늘 그러하듯... 흠흠) 시간에 맞춰 도착했던 우리는
'이 아줌마가 왜 이러세요?'라는 나의 과격한 항의에도 불구하고
간신히 빈 (남의) 자리를 찾아 앉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고
우리의 그런 어수선한 좌석 쟁탈전은 
튜닝을 하고 있던 무대 위 관현악단에 날것으로 생중계되었지.
모르긴 몰라도 이런 경우는 그 날 그 자리에 모였던 모든 이들이
처음으로 겪은 경험이었을 거야.
물론 지혜로운 열린음악회 측은 연주회가 끝나고 현관에서 
환불을 요구하는 모든 관람객들에게 요금을 환불해 주었지.
사실 우리의 분노는 음악회가 진행되면서 거의 사라져버렸는데
그 환불 과정에서 새삼 짜증이 되살아나는 것 있지.
지금은 당근 그 날 우리가 들었던 음악은 하나도 생각 나는 게 없지만.

사실 숫자 100을 돌파했던 날이 바로 환불 복권이 당첨된 그 날인지도 의심스럽지.
한두 번 갔던 것도 아니었으니 아마 대표적인 사건들이 압축되어 기억 나는 건지도 모르겠다.
아마 과거의 일기장을 들추면 자세한 내막이 나오겠지만 그 게 큰 의미가 있진 않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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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퇴근 승객으로 만원을 이룬 전철에서 노약자석은 계륵이다.
이때는 거기에 누구든 앉아줘야 서 있는 사람들도 조금은 편하다(고 생각).
지하철 관련 SNS 댓글에서 가장 자주 언급되는 글이 늙은이들의 출근길 지하철 이용 민폐다.
그렇다고 사람 사는 세상에서 그 시간에 늙은 승객들이 없을까.
앉고 싶은 노친네들은 노약자석이 있는 칸을 알아서 탄다.

심지어 연어가 강을 거슬러 오르듯 필사적으로 비집고 헤치며 찾아오기도 하고.
출퇴근시간에라도 노약자석은 그 지정을 박탈해야 마땅하지 않겠냐.
지금이 IT를 넘어 DT 시대라고 하지만 출퇴근시간에 한하여
노약자석을 선제적으로 깔고 앉을 용기 있는 승객이 절실하게 필요한 아날로그 시대다.
숨쉬기도 곤란했던 (2호선) 지하철 출퇴근길에서는 빈 좌석이 민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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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의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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