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기

슬렁슬렁 2018. 4. 27. 12:45

온 힘을 다해 뛰기 시작하자 부드럽게 얼굴을 쓰다듬다 

가속도가 붙으면서 온몸을 휘감으며 빠르게 흐르던 바람의 물결

물결이 파도로 바뀌자

허둥대는 마음은 두 다리가 따라갈 수 없는 임계점.

머리가 허공을 박자 다리도 뒤를 따르며 나는 운동장 흙바닥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손바닥도 무릎도 까져 아팠을 텐데 기억에 남는 건

혼자만 넘어졌다는 창피함과 당혹감, 수치감



부엌문 앞부터 건넌방 앞까지 마루 위를 

뜨그덕뜨그덕 말발굽 소리 내며 달린 스팔타카스 풍의 말타기 말고

제대로 된 운동장에서 팔과 다리에 힘까지 주면서 달려야 함을 지도하신 분

국민학교 1학년 때 새로운 갑을관계의 세계를 암시하며 등장했던 ㅅㅂㅅ 선생님.



앞으로나란히의 정확한 자세를 알려주시고, 행진중에는

하나 둘 셋 넷을 넘어 둘 둘 셋 넷, 셋 둘 셋 넷까지 거침없이 나아가셨고

내 생애 첫 수업 시간인 국어시간에 

네모 칸들이 찍힌 공책에 각자의 이름을 써보라고 지시하시곤

아래를 훑어보시며 천천히 책상 열 사이를 지나가시다

성을 쓸 때 자음과 모음을 한 칸에 다 집어넣어야 하나 

밥상 위의 젓가락, 숟가락처럼 따로따로 놓어줘야 하나

고민하면서 진땀을 흘리고 있던 나에게

'한 칸에'하시며 곱고 투명한 긴 손가락으로 엷은 하늘색 칸 하나를 동그라미로 그리셨고

어떤 수업중에 한 여자 아이가 오줌을 쌌다는 신고에

아무렇지 않다는 듯 웃으시며 아이를 데리고 나가셨고

'벌거벗은 임금님'이라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말이 되게끔 들려주시곤

당신의 뱃속에는 재밌는 이야기가 가득 차 있어 또 끄집어낼 수 있으니

말 좀 잘들어라, 신신당부를 하셨고

가정방문 때는 내 손을 잡고 가다 한길에서 자전거가 무서운 속도로 다가오자

잠시 기다려서 자전거를 먼저 보내고 바로, 여유 있게 그 뒤로 돌아 길을 건너시던

늘 검정색 투피스를 입고 눈이 반짝반짝 빛나시던 흰 얼굴의 처녀 선생님.



무릎에 발랐던 아까징끼(옥도정기, 머큐로크롬)는 정말 환상적이었다.

무릎을 어떤 각도로 굽히느냐, 아니면

어떤 각도에서 또는 하루 중 어느 때에 관찰하느냐, 

그게 실내냐 실외냐 등에 따라

상처 위 빨간색 약물은 반짝이는 오렌지색부터 어두운 적색까지 

매우 다양한 질감의 색들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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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의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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