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74: NAVER

이어가기 2019.03.26 08:32







찬양의 노래


그는 이 세상에 단 한번 존재했었다. 그리고 '0'이라는 숫자를 생각해냈다.

이름 모를 어떤 나라에서. 오늘날엔 이미 사라졌을지도 모를 미지의 별빛 아래서.

누군가 서약을 했던 무수한 나날들 중 어느 날에.

심지어 그 위대한 발견에는 반대했던 사람의 이름조차 기록되지 않았다.

오로지 '0'이라는 개념 말고는.

인생에 대한 고귀한 철학이나 명언은 하나도 남기지 않았다.

어느 날 장미 꽃잎을 따서 '0'의 모양을 새겨 넣었다든지.

그 장미를 엮어서 꽃다발을 만들었다든지 하는 전설 따윈 없었다.

죽을 때가 되자 백 개의 혹이 달린 낙타를 타고 사막으로 갔다든지.

원시림의 야자수 그늘 아래서 잠들었다는 신화도 없었다.

모래 알갱이 하나까지 모든 것에 대한 셈이 다 끝난 뒤

다시 두 눈을 번쩍 떴다는 동화도 없었다. 대체 어떤 인간이었을까.

우리의 주의력이 빠져나가버린 현실과 허구의 틈바구니 사이에서

그는 모든 운명에 맞서서 꿋꿋하게 저항했다.

자신에게 주어진 각양각색의 모습들을 훌훌 털어버리고자.

마침내 고요가 그를 덮친다. 목소리에 아무런 상처도, 흉터도 남기지 않은 채.

在가 수평선의 형상으로 탈바꿈했다.

'0'은 그렇게 스스로 자신의 이름을 새겼다.


-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소금, 1962> 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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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의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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