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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가기 2013. 9. 30. 06:59

 

 

늑대와 함께 달리는 여인들
클라리사 에스테스 지음, 손영미 옮김
이루·1만8000원

 

여자들이여, 내 안의 늑대와 함께 달리자! 이 책의 요지다. 늑대란 족속은 한국에선 남성의 표상처럼 소비되지만, 이 책은 늑대의 속성이 여성의 본성과 그 원형에서 맞닿아 있다면서 그 늑대를 되살리자고 말한다.

 

<늑대와 함께 달리는 여인들>은 ‘정통’ 여성학 책은 아니다. 하지만 이미 미국에서는 ‘여성 심리학’의 고전이랄까, 대중적인 필독서로 자리잡았다. 1992년 초판 발간 뒤 미국에서만 200만부 넘게 팔렸고 세계 18개 언어로 번역된 베스트셀러다. 기실 한국어판도 1994년 출간됐으나 이듬해 출판사(고려원)가 부도나면서 절판되어 헌책방에서만 어렵사리 구할 수 있던 책이었다. 당시 옮긴이인 손영미 교수가 번역을 가다듬어 20년 만에 한국 독자를 다시 만나게 됐다.

 

영어의 여성(woman)은 그 어원이 ‘늑대(woe)+맨(man)’에 있다고 한다. 지은이 클라리사 에스테스(68)는 미국 덴버에서 카를 융 센터 소장을 지냈고 40년 남짓을 외상 후 심리 치료 전문가로 활동해왔다. 이 책은 융의 분석심리학에 기반하여 신화와 옛이야기의 원형을 분석하고 그 이야기를 통한 심리 치유를 시도한다. 그렇기에 에스테스는 자신을 “심리학자 겸 이야기꾼”이라고 소개한다.

 

에스테스는 타고난 ‘야성’(wild essence)과 직면할 것을 여자들에게 요구한다. 그 직면을 통해서 야성을 회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 야성의 여성성을 ‘여걸’(wild woman)이라 일컫는다. 여걸이란 말 그대로는 ‘길들여지지 않은 여성’, 곧 내 안의 늑대인 셈이다. 에스테스는 여걸의 원형에는 최초의 모계적 생활방식이 담겨 있다고 본다. 그가 신화와 옛이야기, 동화에 주목하는 까닭도 그 이야기들이 원시 상태의 자연이 남긴 것을 통찰할 수 있게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책에서 그는 ‘푸른 수염’, ‘미운 오리 새끼’를 비롯하여 미국 원주민, 중남미, 동유럽, 이누이트, 고대 그리스 설화들에서 인류 이야기의 원형을 끄집어낸다.

 

그 대표적 예가 ‘바살리사 이야기’다. 러시아, 폴란드를 아우르는 발트해 전역에 퍼져 있는 이 설화는 그 원형의 기원이 최소한 고대 그리스 문명 이전에 존재했던 말(馬)의 여신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한다. 바살리사라는 여자아이가 상냥하고 따뜻했던 엄마를 잃는다. 엄마는 죽으면서 바살리사와 꼭 닮은 인형을 건네준다. 아버지는 재혼하고 계모와 두 의붓언니의 계략에 빠진 바살리사는 무서운 숲속의 마귀할멈 바바야가를 찾아가 불씨를 얻어와야 한다. 바살리사는 엄마가 남겨준 인형, 곧 자신의 또 다른 자아인 인형을 품고 바바야가의 집을 찾아가고, 그 마녀의 시험(시련)을 통과(극복)하여 결국 불씨를 얻어 집으로 돌아와 못된 계모와 언니들을 죽이고 행복하게 살았다는 이야기다.

 

바살리사가 벌벌 떨며 “불씨를 달라”고 말하자, 바바야가는 무서운 얼굴로 묻는다. “그런데 왜 내가 불을 줘야 하지?” 이에 바살리사는 내면 속 인형과 상의한 끝에 이렇게 답한다. “그건, 제가 달라고 하니까요.”

 

그러자 바바야가는 “흠, 그게 바로 정답이다”라면서 불씨를 건네준다. 바바야가가 무서운 존재인 것은 생명의 상징인 동시에 죽음의 상징인 탓이다. 그의 특징은 너무나 위협적이지만 지극히 정당하다는 점. 바살리사가 자기 자신을 존중하는 한, 결코 바살리사를 해치지 않는다.

 

그림 이루 제공

 

이 설화는 친절하기만 했던 어머니와 결별하고 숲속의 여걸 바바야가를 만나 자신 속의 여걸을 깨닫고 받아들이는 이야기다. 무서운 여걸을 담대하게 마주하는 것이 소녀에게 주어진 첫 과제였다면, 여걸과 친숙해지고 그 야성을 어느 정도 받아들이고 약간은 동화될 필요가 있다고 에스테스는 말한다. 못된 역할인 계모나 두 언니 역시 자기 내면의 한 본성이다.

 

그는 많은 여성이 낮에는 자기 감정이나 상대의 태도와 무관하게 지나치게 상냥하게 미소지으면서도 밤이 되면 짐승처럼 이를 간다면서, 이는 내면의 바바야가가 표출되지 못하고 억눌려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바살리사 같은 상황에 처한 여성은 대개 남의 뜻에 고분고분 따르려는 충동을 느낀다. 그런데 자기 뜻대로 하면 그들에게 버림받을 것이고, 남의 뜻에 따르면 자기에게서 버림받는다. 지혜가 요구될 때 외려 착한 소녀가 되려고 애쓰는 것은 미덕이 아니다. 억압적 환경에서 착하게만 행동하면 돌아오는 것은 더 많은 학대와 부당함뿐이라고 에스테스는 말한다. 과잉보호의 어머니를 떠나보내고 숲속 무서운 마귀할멈을 만나라. 내 안의 마귀할멈, 곧 직관과 직면할 때 ‘될 대로 되라’던 내 태도는 ‘진상을 모두 밝혀 보자’로 바뀌게 된다는 것이다.

 

<늑대와 함께 달리는 여인들>은 이야기에 역사가 깃들어 있다고 믿지만 남성과 여성을 역사적으로 비교·고찰하는 책은 아니다. 심리학과 이야기에 젖줄을 댄 자기계발서에 가깝다. 옮긴이가 짚었듯이 정치·사회적 변혁보다는 개인의 노력으로 삶을 바꿀 수 있다고 본다는 점에서 과도한 심리학 중심주의의 함정도 품고 있다. 그런데 내면의 늑대에게 귀 기울이라는 에스테스의 속삭임을 듣노라면 그 말에 쏙 빠져 고개를 주억대게 된다. 착한 어머니를 극복하고 야성의 마녀 바바야가를 받아들였던 바살리사처럼 말이다. 이 마법은 인류가 오래도록 의지해온 이야기의 힘에 근거한다.

 

허미경 기자 carmen@hani.co.kr, 그림 이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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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의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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