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7

이어가기 2013. 10. 9. 09:13

 

 

정혜윤의 새벽세시 책읽기

존 버거의 글로 쓴 사진
존 버거 지음, 김우룡 옮김
열화당·1만원 

<존 버거의 글로 쓴 사진> 한 부분을 친구가 한국을 떠나는 마지막 밤에 작별 선물로 읽어 주었다. 글 속에서 존 버거는 로스티아란 친구를 만난다. 로스티아는 이제 막 군복무를 마치고 갓 제대한 사람처럼 보였다. 하지만 실제로 그는 어떤 군대에도 가보지 않았다. 생존을 위한 긴 투쟁 자체가 그에겐 말하자면 끝없는 기동훈련만 같았던 것이다. 삶이 군대 생활 같다 보니 그의 꿈은 휴가를 얻는 것이었다. 휴가를 얻으면 뭐 할 건데? 미친듯이 그림을 그리는 것, 그것이 그의 꿈이었다.

 

로스티아는 세월이 흘러서 건축 사무실에서 시간제로 도면 그리는 일을 얻게 되었고 스튜디오를 마련해서 존 버거를 초대했다. 로스티아는 늘 전깃줄에 매달려 있는 전구와 전구갓을 그렸다. 그림마다 저마다 다른 광대한 풍경들이 전등 불빛 아래 드러나 있었다. “지표면 어딘가를 한 개 두 개 혹은 네 개의 전구가 한 가족처럼 비추고 있는 그림들”이었다. 볼수록 훌륭한 그림이었지만 존 버거는 어두운 생각에 빠져들었다. 자신이 영어로 글을 쓰는 가장 영향력 있는 미술비평가라는 말을 듣고는 있지만 그 그림들을 팔리게 만들 재능이 전무하다는 생각에 마음이 어두워졌던 것이다. 그때 로스티아가 불쑥 말한다. “왜 그래요? 그림이 마음에 안 들어요?”

 

질문이 아무리 천진해도 존 버거는 괴로운 마음을 떨치기 힘들었다. 저 멋진 그림들이 세상 어딘가에서 인정받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둘은 물감을 사지 않고 직접 만들어 쓰면 얼마나 싸게 먹히는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기름 냄새를 맡고 나니 좌절감이 잊혀지기 시작했다.

 

“다시 열두살 때로 돌아가 있었다. 처음으로 유화물감 한 상자와 연습장만 한 팔레트를 가지게 되었던 때였다. 물감이 담긴 튜브들은 먼 나라에서 온 꿈같은 이름을 달고 있었다. 인디언 레드, 나폴리 옐로, 원색 시에나. 그리고 눈보라에 흩날리는 눈송이를 연상시키던 그 신비한 이름의 플레이크 화이트. 기름 냄새는 나를 반세기 전의 약속으로 되돌아가게 했다. 그리고 또 그릴 것, 한평생 매일 그릴 것, 죽을 때까지 다른 것은 말고 그림만 생각할 것이라던.”

 

시끄러운 맥도널드에 앉아서 친구를 위해서 이 부분을 읽었다. 왜냐하면 그 친구가 바로 “한평생 매일 그릴 것” 같은 화가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사실은 나 자신을 위해서도 읽은 셈이었다. 우리는 수단과 목적으로 가득한 세상을 살고 있다.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많은 것들조차도 자신의 결핍을 메우려고, 기껏해야 자존감이나 경쟁력을 높이려고 수단시하는 우를 범한다. 그렇지만 기름 냄새가 존 버거에게 그림을 파는 걱정에서 벗어나게 해준 이 부분을 읽을 때 나도 덩달아 깨끗한 종이 냄새로 돌아가게 되고 코를 벌름거리게 되고 내가 책읽기를 좋아했던 사람임을 기쁘게 기억해 낼 수 있었다.

 

나는 친구에게 말했다. 원래 너는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잖아. 그걸로 충분했잖아. 원래 나는 책 읽는 것을 좋아했잖아. 그걸로 충분하잖아. 우리는 그걸로 뭘 하려는 이유도 없이 그것들을 좋아하기 시작했잖아. 친구는 지금쯤 비행기 안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을 것이다. 창 너머로 보이는 별빛과 달빛을, 창 안에 독서등을 켜놓고 책을 읽는 이름 모를 승객을. 이 생각을 하며 나는 또 다시 책장을 펼치는 것이다.

 

정혜윤 <시비에스> 피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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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의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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